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이집트 (문단 편집) == 개요 == [youtube(omajagaozk0)] [[이집트]]의 [[고대]] 문명 시기. 사실 '고대'라고 하나의 말로 묶긴 하지만, 이집트의 [[역사]]가 워낙 오래되었다 보니 단일 시기 분류로 묶기에는 매우 방대한, 3000년이 넘는 기간이다. 남은 자료가 많지 않고 다른 문명권과 같이 묶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단일 시기로 퉁친 것에 가깝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하필 이집트에서 발달한 데는 [[나일 강]]의 특성이 크게 기인했다. 나일 강의 가장 큰 특징은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다. 강이 가끔 범람하는 것이야 비가 많이 오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나일 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범람 시기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강이 범람하는 이유는 청나일 강 상류 [[에티오피아 고원]] 지대에 [[5월]] 무렵 내리는 계절성 폭우 때문인데, 이런 범람은 [[9월|9]]~[[10월]]쯤에 나일 강 하류 이집트에 도달해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 및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득 옮겨준다. 땅이 홍수에 잠겼다가 11월쯤부터 다시 드러나면 [[지력]]이 매우 높아진다. 이처럼 나일 강의 범람 시기는 예측이 가능하므로 사람이 사는 곳은 물이 많아져도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만들고, 범람 시기에 맞춰 농사를 지으면 작물이 잘 자라게 된다. 대략 [[7월]]에 작물을 수확하면 10월에 다시 홍수가 와서 지력을 보충해주었다. 이러한 나일 강의 존재로 인해 고대 이집트는 비료나 농법이 발달하기 전, [[농업|농경]] 사회를 이어 나가기에 최상의 환경이었다. 공간적 이유는 이렇고, 시간적으로 상당히 오랜 시기부터 발달해 온 것은 [[구석기 시대]]에 있었던 인류의 대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현생 인류는 해당 시기 아프리카 [[초원]]을 벗어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집트는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맞닿뜨리는 비옥한 토지이자 강 유역이었다. 나일 강 처럼 [[문명]]을 만들기 좋은 지역이 다른 곳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지역까지 정착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1만 500년 전(기원전 8500년)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급상승하던 시기에 [[북아프리카]] 일대에 [[몬순]]이 갑자기 내려 건조했던 [[사하라 사막]]이 잠시 초원으로 바뀌고 인간 집단 약 7천여 개 남짓이 현재의 사하라 일대에서 유목 문화를 이어가다가 홀로세 최적기가 끝나고 지구의 기온이 점점 낮아지면서 기원전 5300년경 이집트를 시작으로 몬순 기후가 점차 끊기고 다시 사막 기후가 확산되면서 사하라 사막이 다시 부활했고, 북아프리카 초원에 거주하던 인간들은 오아시스와 나일 강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지금처럼 사하라 사막이 완전히 건조해진 시기는 기원전 3500년으로, 초기 이집트 문명이 형성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가장 먼저 정착을 시작하고 고효율의 농업 생산이 가능하며 북아프리카 초원의 사막화로 이주민이 몰려들어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관개 농업이 가능한 이집트에서 문명이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터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 6,000년 정도 이전(대략 '''기원전 36세기''')부터 상이집트, 하이집트[* 여기서 상•하는 나일 강의 상•하류를 의미한다. 그래서 북쪽이 위로 가게 그리는 일반적인 지도에서는 [[지중해]]와 [[중동]] 지역에 가까운 윗부분이 '''하이집트'''에 해당하고(지중해에서 지금의 카이로까지), [[카이로]] 남쪽의 고왕국 당시의 수도인 [[멤피스]]부터 지금의 아스완 댐 근처의 급류 지역(First Cataract라고 불리는 지역)까지가 '''상이집트'''에 해당한다. 거기서부터 남쪽은 이집트 본토로 안 쳐주었다고 한다.]로 나뉜 국가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를 언급할 때 바로 이 시대가 인용된다. 즉 '''아직 [[북유럽]] 끝자락에 [[매머드]]가 남아 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등장했다.'''[* 사실 '''파라오'''라는 명칭이 대내외적으로 쓰인 때는 기원전 1500년을 전후한 중왕국 시기인데, '고대 이집트의 지배자=파라오'라는 생각이 널리 통용되는 터라 그렇게 쓴다. [[매머드]]는 [[북극해]]의 몇몇 섬에서 기원전 1700여 년경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6년에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7,300년 전, 즉 기원전 5316년 무렵의 도시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1/25/2016112500645.html|기사 참고]] '''즉 [[청동기 시대]] 원시인인 [[외치]]가 태어나기 2,000년 이전에 이집트에선 이미 도시 문명이 등장했다.''' 기원전 3100년 무렵에 처음으로 통일된 이집트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가 쓴 기록에 의하면 [[메네스]]가 제1왕조를 창시하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했다. [[대한민국|한국]]의 [[단군]]처럼 [[이집트인]]들에게는 메네스가 시조로 여겨진다. 다만 유적 발굴 조사에 의하면, 이집트 제1왕조의 초대 파라오는 [[나르메르]]란 인물인데 이 인물이 메네스와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혹은 나르메르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이후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여 당시의 기술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토목 기술과 의학, 예술 등이 발달했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효된 [[빵]]과 [[오븐]]을 만들었으며, [[이집트 상형문자|히에로글리프]]도 이때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참고로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건설된 시기는 이집트 문명이 시작된지 약 1,000여 년이 지난 시점인데 중국 [[상나라]]의 갑골 문자가 사용되기 1,000년 전이었을 정도로 이집트 문명은 오래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통일 왕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 처음 통일된 시기인 기원전 32세기 즈음부터 왕국이 혼란에 빠지는 기원전 22세기 즈음까지 약 1,000년간의 [[이집트 고왕국|고왕국 시대]], 혼란이 수습된 기원전 21세기 이후부터 힉소스인에게 정복당한 기원전 18세기까지 약 300년간의 [[이집트 중왕국|중왕국 시대]], 그리고 힉소스로부터 독립한 후인 기원전 16세기부터 제20왕조가 멸망한 기원전 11세기까지 500년간의 [[이집트 신왕국|신왕국 시대]]이다. 이게 얼마나 기냐면 각각의 기간과 간극은 대략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기원전이 안 끝난다.''' 피라미드가 처음 건립된 시기부터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있었던 시기 사이의 간격보다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있었던 시기와 '''[[iPhone]]'''이 출시된 시기의 간격이 더 짧다. [[고대 로마]] 시절, [[로마인]]들에게도 [[피라미드]]는 이미 '''고대 유적''' 취급을 받았고, 그 시절에도 이미 관광 코스였다.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나일 강 유람을 즐기면서 피라미드를 구경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이다. 그 밖에도 제정 이후 로마인들이 이집트에 관광을 와서 [[바가지(경제 용어)|바가지]]가 너무하다는 불평을 한 기록이 많다.[* 놀랍게도 이때도 [[기념품]]이라는 게 있었다. 주로 작은 피라미드 모형, 은제 동상,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그려진 항아리 등을 팔았다고 한다.]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등, 로마인들이 남긴 건축물들도 현대인들에겐 '고대' 유적으로 취급 받는 걸 보면 얼마나 그 간격이 긴지 알 수 있다. 현대인이 보기에 콜로세움이 2,000년 된 고대 유적이듯, 고대 로마인이 보기에는 피라미드가 2,000년 된 고대 유적이었다. 좀 더 세세하게 숫자+[[왕조]]로도 구분하는데, 마지막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까지 '''굵직한 왕조만 총 32개 왕조가 있었다.'''[* 이런 시대 구분은 현대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의 역사학자 마네토가 고안한 시대 분류를 현대까지 사용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많아 보이고 사실 실제로 많은 것도 맞지만 동양식 역사 구분으로 따지면 [[신라]], [[조선]] 같은 구분이 32개나 있었던 개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제3왕조 마지막 파라오인 [[후니(파라오)|후니]]와 제4왕조 초대 파라오인 [[스네프루]] 사이의 정치적 단절은 없었고, 꼭 [[역성혁명]]이 아니라도 한국사의 [[원성왕]], [[신덕왕]], [[세조(조선)|세조]] 같은 [[사위]] 계승이나 [[방계]] 계승이 일어나도 왕조 교체로 친 것이었다. 유구한 역사이니만큼 인류 역사에서 [[강대국]]의 자리를 매우 오랫동안 유지했다. 이집트라는 지역은 항상 고대 [[지중해]] 세계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중세 [[이슬람 제국]] 시절에도 중요했다. 냉전기에는 [[중동전쟁]]의 주역으로서 냉전의 최전선에 선 채 능동적으로 지역을 움직이곤 했다. 현대의 이집트 역시 중동에서는 역량 있는 [[지역 강국]] 중 하나이며,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손꼽히는 강대국이다. 참고로 고대 이집트와 현재 이집트 주민이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집트에서 발굴된 미라에서 검출한 [[DNA]]를 다른 지역 고대인들의 DNA와 비교해 보면 [[사하라]] 이남 지역보다는 [[레반트]] 지역 주민들과 유사하다고 한다. 현재 이집트인의 DNA를 고대 [[미라]]의 것과 비교해 보면 현대 이집트인의 DNA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로마군의 침입을 거치면서도 고대 미라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영향이 15~25% 정도 나타난다고 한다. 크라우스 박사 팀에 의하면 이는 나일 강 유역에서 [[노예 무역]]을 포함하여 상호 교역을 많이 했기 때문이거나, 중세에 [[이슬람]]이 사하라 남쪽으로 확산되면서 사하라 이남 지역과 접촉한 결과인 듯하다. [[https://research-paper.co.kr/news/view/304|#]] 사실 너무나 당연하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인 것이, 역사가 시작되던 무렵의 혈통을 현대까지 있는 그대로 쭉 유지해 오고 있는 집단은 [[노스 센티널 아일랜드|고립된 원시 부족]]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당장 고대 이집트 왕조들 중에도 [[이집트 제25왕조|흑인 왕조]]가 존재했다.[* [[단일민족국가|단일민족]]으로 유명한 한국도 [[예맥]]([[고구려]]-[[말갈]])과 한(삼한)이라는 두 민족이 합쳐져서 지금의 [[한민족]]이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